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문단 편집) === [[나폴레옹 전쟁]]기 === 그러나, 1806년 [[예나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출전한 블뤼허는 다른 프로이센군과 함께 대패해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의 부대와 규합하여 뤼벡 근교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항복해 생에 두 번째 포로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군]]의 최고 사령관인 [[나폴레옹]]과 자신의 부대를 포위 섬멸한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에게 원한을 품어 프로이센으로 복귀 후 프랑스군과 싸울 때마다 "나폴레옹을 반드시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으며 베르나도트와도 계속 반목하게 된다. 심지어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왕태자가 되어 나폴레옹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프랑스]]에게 연패한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의 절반을 잃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에게 복수하려는 국민감정이 들끓게 되었으며, 나폴레옹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진 블뤼허는 프로이센 애국파의 리더격으로 부상, 포메른군 사령관에 임명되고 1809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자 블뤼허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프랑스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지만, 당시 프로이센의 힘으로는 프랑스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국왕 빌헬름 3세는 블뤼허를 포메른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 그러나,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처절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자 빌헬름 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블뤼허를 군에 복귀시켜 프로이센 총 사령관에 임명한다. 블뤼허는 샤른호르스트를 참모장으로 삼아 뤼첸과 바우첸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참모장 샤른호르스트가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고, 별 수 없이 휴전을 맺는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유럽 각국과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은 다시 재기하여 동맹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한 총공세를 실시하며, 블뤼허는 신임 참모장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8월에는 카츠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의 [[자크 마크도날]] 원수의 부대를 완파하고, 10월에는 몽시게른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군을 격파, 프랑스군을 심대한 위기에 빠트리는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원수로 진급한 블뤼허는 요르크, 슈바르첸베르크, 비트겐슈타인 등과 연합하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작살내면서 드디어 전[[독일]]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그리고 그 공로로 '''대십자 훈장'''을 받는데, 이는 독일 역사상 블뤼허 원수와 [[제1차 세계 대전]]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원수만이 받은 훈장이다. 1814년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침공한 블뤼허는 몇차례 부분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지만, 3월 13일 파리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4월 4일 나폴레옹은 퇴위 후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블뤼허는 "나폴레옹은 총살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3일 발슈타트 [[후작]]위를 받은 블뤼허는 군에서 은퇴하여 [[영국]] 등을 방문한 뒤 슐레지엔의 영지에 정착한다. 그리고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그르노블을 거쳐 다시 파리에 입성하자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다시금 총사령관에 임명된 블뤼허는 그나이제나우를 다시 참모장으로 임명하고 13만에 달하는 프로이센군과 함께 벨기에로 향했다. 이어진 리니 전투에서 블뤼허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공격으로 프로이센군 중앙이 초토화되는 와중에 뤼초가 이끄는 1군단 기병대의 선두에서 프랑스군을 향해 돌격했지만 프로이센 기병들은 잘 훈련된 프랑스군에게 손을 쓰지 못했고, 뒤따르던 프랑스 흉갑기병에게 차단당하며 괴멸했다. 그 과정에서 블뤼허 역시 낙마하여 자신에 말에 깔렸다. 리니 전투 이후 무질서한 후퇴과정에서 블뤼허가 사망했다고 생각한 그나이제나우는 웰링턴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리니 전투에서 웰링턴이 지원을 오겠다고 약속하고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군 역시 당시 카트르브라에서 프랑스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오는 것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더이상 영국군과 협력하려하지 않고 프로이센으로의 퇴각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부하들에 의해 근처 농가에서 발견된 블뤼허는 그나이제나우의 후퇴명령을 취소하고 '''자신의 감 하나만으로 프로이센 병력을 와브르 방향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이 선택은 결정적인 선택이 되었다. 3군단을 와브르에 배치하여 숲 속 탐험을 즐기던 그루시의 미끼로 삼은 블뤼허는 워털루로 진격했고, 행군 과정에서의 착오로 먼저 도착한 2군단과 4군단이 플랑스누아에서 프랑스 6군단과 청년근위대를 상대로 혈투를 벌이며 프랑스군의 예비대를 소모시켰다. 마침내 [[워털루 전투]]도 끝물로 접어들어, 제국 근위대가 공격하던 시점에 프로이센 1군단이 영국군 좌익에 도달하며 일제히 반격을 가했고, 프랑스 우익의 프로이센군은 고참 근위대 2개 대대의 반격에 무려 14개 대대가 쫓겨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근성의 물량웨이브로 마침내 오후 내내 난타당한 프랑스군의 '빈약하고 지친 전열'을 밀어내고 청년 근위대까지 격퇴하면서 플랑스누아로 쏟아져 들어와 워털루 전투는 종료되었다. 워털루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다시 실각하여 남대서양의 오지인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했고, 블뤼허는 잠시 파리에 머물렀다가 귀국, 노령을 이유로 사령관에서 물러나 [[슐레지엔]]에 정착했다. 이후 짧은 만년을 즐기다가 1819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러나 그는 사후에 굴욕을 당하는데, 1945년 그의 묘지도 소련군에 정복되자, 소련군은 그의 유골을 꺼내어 [[두개골]]로 [[축구]]를 했다고 전해진다. 소련군이 떠난 후 어느 폴란드 신부가 간신히 유골은 수습했으나, 현재 [[폴란드]]에 있는 그의 묘는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